사랑의 형태
로토스코핑 영상 06:26:07 / 사탕 오브제 가변 설치 / 2017
사진 / 이인미 작가님
사랑은 인간의 삶에서 모든 관계를 포용하는 언어로 사용된다. 우리가 쉽게 알고 있는 연인 간의 사랑에서부터,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오고 가는 감정 속에서, 친구 간의 우정 속에서 드러난다. 사랑은 이뿐만 아니라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를 넘어 사회를 묶는 집단 간의 소속감, 애사심, 국가를 향한 애국으로 확대되어 사용된다. 사랑은 이러한 관계들을 긍정적으로 포장해내면서 동시에 그 속의 다양한 감정과 이성의 불분명한 작용들을 포용해내는 힘으로서 관계를 끊임없이 기능하게 만든다.
<사랑의 형태> 애니메이션 작업은 이 시대의 공익 광고가 그려낸 ‘올바른’ 사랑의 형태들을 수집해 풀어낸다. 사회구성원의 대다수가 공감, 납득하는 사랑의 형태들 속에서 사랑에 대한 여러 단상들을 풀어낸다. 이렇게 애니메이션 속에서 사탕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형태를 가진다. 포자처럼 분열하는 형태, 작게 구겨졌다가 펴지는 형태, 지렁이 마냥 주름이 새겨지면서 퍼져나가는 형태들은 여러 형태의 사랑들이 가지는 사랑의 온도차를 드러낸다.
이런 추상적 이미지들은 사탕이라는 고정되고 결정화된 형태로 만들어진다. 사탕은 끊임없이 저어내지 않으면 결정화된 이후에도 손쉽게 부서지고 녹아 형태가 흩어진다. 끊임없이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과 힘들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허물어지는 사랑의 형상들을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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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된, 주어진, 불리어진 것들에 맞서기
김수정 작가는 아직 개인전을 하지 않은 신진작가이다. 그렇지만 학부 때부터 지금까지 여러 그룹전에 참여하면서 전시를 익혀 왔고, 그룹전이라는 형태 안에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해왔다. 이 글은 작가론이라는 거창한 이름보다는 김수정 작가가 전시에서 보여주었던 개별 작업이 어떤 문제의식을 던지고자 하였는지를 살피고, 이번에 전시하는 <사랑의 형태>에 대해 대략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의 작업은 시각적 완성도나 완결성이 눈에 띄기보다는 작가가 편치 않은 어떤 이야기나 상황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한다. 사람이든 상황이든 그에게 현실은 아름답거나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작가는 즉자적으로 드러난 존재와 상황이 꼭 그러해야만 하는지를 우선 묻는다. 그리고 부인과 부정으로부터 기존의 전제에 대해 대립각을 세운다. 그런데 그 대립각이 날카롭지는 못하다. 그러한 조건과 구조를 낱낱이 파헤치려 한다거나 부정을 넘어 다른 것을 생산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은 이 부인의 상태, 부정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주체적이기보다는 외부의 상황과 조건에 의지한 경우가 많다. 이는 분명 김수정 작가 스스로가 넘어야 할 한계이기도 하지만, 이 부정과 부인의 상태는 분명 다른 상태로의 지양을 보유하고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초기작업 <자기소개>(2012), <이력서>(2014), <뿌리>(2014)에 드러난 고민은 지금도 이어진다. 이 작업들은 그 시기까지 자신의 삶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를 살피고자 한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드러난 ‘나’의 모습은 과잉되거나 나르시시즘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자기의 사진을 이용하여 유년시절부터 당시까지의 모습을 담담히 진술하는 <자기소개>, 연필로 그려낸 듬성듬성한 <이력서>, 자기 성씨의 기원을 묻고자 채소의 뿌리에 빗댄 영상 <뿌리> 작업까지, 작업 초기부터 김수정에게 ‘나’는 고립된 자의식을 대면하기 위한 ‘자아’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사회적 자리를 표현하는 것으로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관심은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에 대한 문제로 확장된다. <소외된 경력들>(2015)에서 청년들은 어둡고 우울한 모습의 조각으로 나타난다. 이는 건설노동자, 미대생, 취준생, 인턴사원, 나래이터 모델, 택배기사,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생 등 불안정한 조건에서 일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조각물들은 그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 투박하고 부자연스러운 자세, 생기를 잃어버린 표정을 하고 있다. 조각의 재료가 시멘트였기 때문에 주제와 더 일치된 표현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주체화하지 못한 ‘소외된’ 모습을 끄집어낸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설치 작업 <문턱넘기>에서 반복되어 나타난다. 문턱을 상징하는 구조물 너머에 ‘당신은 이 사회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잉여시간 소외된’, ‘희망을 가져라’ 등의 텍스트를 통해 패턴화된 구조에서 청년들이 그에 순응하는 것이 온당한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외부적인 힘으로 인한 내부의 균열 혹은 파괴는 <일상유지>(2016)와 <밟지마세요>(2016)에서도 구체화한다. <일상유지>는 작가가 현대 사회에서 위기에 놓인 가족의 모습을 포착한 것이다. 가족 구성원 각자가 처한 사회적 고통 때문에 가족은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 때문에 시멘트로 만들어진 작은 군상들은 외부적 힘에 의해 도미노처럼 엎어지거나 넘어진, 깨진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 재개발 문제를 다룬 <밟지마세요>에서 외부적인 폭력은 삶의 터전을 위협하며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해치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하나의 공동체는 외부적인 상황으로 인해 고통받고, 위태로운 상황을 겪는 운명으로 드러난다.
작가는 가부장제 사회와 여성의 관계를 작업으로 끌어내기도 했다. 결혼과 육아가 한 여성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고자 했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희생의 구조>(2014)에서 여성은 희생자라고 전제되었다. 물론 가족 내에서 여성의 희생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여성 또한 그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주체라는 점이 간과된 주장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전제에 의해 작성된 설문지에 여성들이 실제로 다양한 경험을 기술함으로써 작가는 자신이 세운 전제를 의심하고 또 다른 의미를 획득하기도 했다. 한편 최근 작업인 <삶을 소외시키지 않는, 스스로 책임지는 말하기>(2017)는 작가 자신이 유년시절부터 현재까지 겪었던 성적 폭력, 사회적으로 만연한 남녀차별에 대한 생각을 진술한 영상 작업이다. 감상자는 30여 분의 시간 동안 편집 장치가 거의 없는 영상 속 진술을 바라봐야 하는데, 연필이 책상을 긁어내는 듯한 소리는 마치 신음이나 비명처럼 들리는 것 같다. 그의 선언에서 페미니스트는 논증되기보다 경험과 고백으로 구성된 자의적 형태를 취한다. 그래서 그가 대변하고 있는 여성은 왜소해 보인다. 여성은 억압받고 희생당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이 또한 여성이라는 존재를 특수화한 일면적 규정일 수 있다.
김수정의 작업은 사회로부터 부여된, 주어진, 불리어진 것에 대한 거부가 있다. 청년들의 불안정한 고용, 재개발문제, 가족 내에서의 여성의 희생,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위치에 놓인 여성, 사회로부터 위협받는 가족 등 그가 이러한 문제들을 관찰하고 그것을 통해 구조를 반성하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래서 그 사안들이 갖는 무게감, 심각함에 대해 상기하도록 하는 것도 맞다. 하지만 그것이 부여된, 주어진, 불리어진 것에 대한 단순한 거부라면, 그것은 단순한 반대(안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이번에 전시되는 <사랑의 형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사랑이라는 큰 개념에 두고 고찰하는 작업이다. 사랑은 행복하고 아름다운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사랑의 형태를 쫓는다. 작가가 사랑의 형태로 키워드 삼은 가족애, 연인 간의 사랑, 우정, 사제, 동료애, 애국, 인류애는 우리가 일상에서 관계 맺는 방식을 지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애국이나 인류애는 개인적 관계를 넘어 좀 더 개념적인 범주로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나 이들도 사랑의 이름으로 정의가 시도된다. 각각의 키워드는 동일한 시점에서 진술되는 것은 아니며, 여러 측면에서 기술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물론 애니매이션을 통해서 사랑의 형태가 완전히 정의될 수는 없다. 작가는 패턴화된, 정형화된 것과는 다르게 보고자하며, 사랑을 절대화하지 않으려는 여러 관점을 제시하려 한다.
사랑의 여러 종류와 진술 사이에 등장하는 상징적 형태는 모였다가 흩어지고, 형태를 만들다가도 사라져버리는 것 등 운동하는 이미지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 상징적인 형태는 스크린 바깥에 사탕의 형태로 빽빽하게 설치된다. 작가는 잡히지 않는 사랑을 사탕과 유사한 형태로 고정시키고, 이를 관객들이 가져가도록 유도했다. 애니매이션과 설치작업을 매개하는 사탕이라는 형태, 그리고 그 형태는 이 작업들과 관객들을 매개한다. 그러나 이는 필연적이기보다는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매개물로 기능하고 있다. 이러한 자의성이 드러내는 한계는 극복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랑’의 ‘형태’를 보여주고자 했던 작가의 시도는 사실상 너무 큰 개념을 작업의 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번 작업에서 전작의 문제의식을 사랑이라는 개념에 어떤 식으로든 모으고자 하고 재규정하려 한다는 점에서 나름의 총체화를 시도한다. 그 개념은 단순할 수 있지만, 사랑의 형태를 통해 인간들이 관계 맺는 방식과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랑’으로 명명된 관계들의 총체는 좀 더 이론적으로 고민해야 할 지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랑은 현상적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 그 관계들의 본질을 논하기에는 약한 관념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사랑의 형태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의 본질을 찾는 것, 이 작업에 대한 앞으로의 해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신양희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