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과 전쟁은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All is fair in love and war》
공간 힘 Space heem
김수정 개인전 Kim Sujeong's 1st Solo Exhibition
2017.11.3.(Fri) - 11.18.(S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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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
"삶 속에서 개인에게 잔재되는 폭력의 흔적들은 여러 특성을 만들어낸다." 미디어에 연일 보도되는 한 개인이 벌여온 사건, 사고, 행동, 행위들은 단순히 그 개인이 가진 어떠한 특성으로부터 발현된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명명할 수 없는 어떠한 폭력적 행동들은 그가 삶 속에서 겪어온 폭력의 잔재들로부터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폭력적 행동들이 발현되기 전까지, 이러한 과정들은 대체로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지켜져 왔던 행동들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져 온다. 나는 나의 삶 속에서 이루어져왔던 잊혀 지지 않는 이질적인 순간들과 폭력적인 순간들로부터 지금의 나가 구성되기까지의 과정들을 돌이켜 보며, 사회가 사랑이란 이름하에 용인하는 수많은 것들이 얼마나 인간의 본질을 바꾸어 가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했다. 사회는 '사랑'의 실패에 대해 많이 너그러워진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사랑의 성공은 미디어를 통해, 거대한 서사처럼 퍼져나간다. 하지만 사랑의 실패에 대해 쌓여진 가부장제적 시선들은 특히 여성에게 그러한 사랑이란 이름하에 용인되는 폭력들을 버티게끔 강요한다.
전시비평: 김선영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밟아 걷기
공간 힘에서 전시를 개최하기 전, 작가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시각화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계피 맛 사탕을 만들고, 수백 개를 벽면에 붙여 관람자가 직접 사탕을 떼어먹을 수 있도록 했다. 이때 사탕은 투박해서 녹여 먹기 불편한 모양으로 만들어졌는데, 사랑을 사탕에 비유하여 추상적으로 떠올리는 사랑과 실제 사랑을 하는 과정에서 개인이 감내해야 하는 불편함을 표현한 작업이었다. 또한, 작가는 사탕을 만들 때 불 위에서 타지 않도록 쉬지 않고 저어야 하는 과정이 있었다고 하며, 이 과정이 마치 사랑을 할 때 필수적인 ‘관계’ 형성의 과정과도 같았다고 말했다. <사랑의 형태>( <2017 멘토링展 2> 센텀시티 신세계 갤러리, 2017)
사랑은 맺는 관계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가령, 가족애·애국·우정·우애·모성애·연인 간의 사랑 등으로 불리는 것들이다. 작가는 ‘사랑의 형태’를 설치작품인 사탕을 비롯해 영상작품에서도 구체적인 모양으로 드러냈지만, 각각의 관계마다 다른 사랑의 방식과 그 이면들을 단순히 하나의 형태로 대변되도록 표현하면서 사랑과 그 이면에 있는 불편함 마저 여전히 추상적인 형태로 남게 했다. 이에 비해 이번 전시에서는 사랑을 ‘전쟁’과 같은 선상에 놓고 전시를 구상했다. 전쟁은 승리/지배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그것이 행해지는 과정에서 특히나 약자, 여성·노인·어린이가 쉽게 억압과 폭력에 노출되며, 그와 같은 상황을 ‘전쟁’ 중에는 불가피한 것으로 정당화한다. 이런 점에서 작가는 목표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랑과 전쟁의 맹목적인 성격에 집중하여, 가부장적인 권력에서 비롯된 폭력적, 억압적인 면을 조명하고 있다.
전시장 일부 바닥에 이불이 배치되어 있다. 전시는 신발을 벗고 이불 위를 밟는 것으로 시작된다. 소재가 된 이불은 주로 사적인 공간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 본래 몸을 ‘덮는’ 보온의 기능을 하며 포근함, 따뜻함을 느끼는 물건이다. 또한, 꺼려지는 것들, 이를테면 보여주고 싶지 않은 감정이나 몸, 소리 등을 덮어 막기도 한다. 이처럼 이불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면서 겹겹이 포개지고, 뭉쳐져 바닥으로부터 두께를 만든다. 이불이 배치된 바닥은 아늑하고 편안하지만 몇몇 언덕을 밟을 때면 한쪽 발이 움푹 들어가기 때문에 걸음이 조금 불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작가는 이불을 ‘밟는’ 행위를 강조함으로써 관람자가 보편적인 푹신한 이불을 넘어 다르게 감각하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신발을 신은 채로 관람했다면 이불을 오염시킬 수 있겠다는 걱정과 함께 이불의 푹신함을 이질적이게 느껴 볼 수 있었겠다는 아쉬움이 든다.
이불 위를 걷다 보면, ‘사랑의 순간’들을 상징하는 다섯 점의 이불 드로잉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머리채를 잡는 모습, 가족을 위해 희생했던 어머니의 손, 어머니로 보이는 초상, 구원의 전화기, 텔레토비 캐릭터 중 어린 막내 여동생으로 대변되는 두 개의 뽀 캐릭터가 그것이다. 관람자는 각각의 드로잉을 찾아가면서 그것들이 곧, 고생과 희생, 폭력의 순간들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작가는 그 순간들을 이불 위에서 관람자와 함께 하나씩 꺼내보며, 희생과 폭력이 과연 ‘사랑의 순간’이었는지를 되묻고 있다. 과연 우리와 관계하는 어떤 이가/어떤 이를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하고, ‘구원’을 필요로 한다면 과연 이 관계를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시선을 돌리면 쌓인 이불 더미 속에 영상이 재생되고 있다. 영상은 주로 공익광고로 구성되어 있는데, 집안일을 하는 어머니와 임신한 여성, 취미로 골프를 치고 싶어 하는 아버지와 회사원인 남성, 딸과 아들이 나오는 ‘화목한’ 가정을 관람/구경하게 된다. 영상의 화기애애한 장면과는 다르게 음향은 전혀 들리지 않아 고요하고 어색하다. 미디어는 가족의 관계를 ‘화목’하고 긍정적 이게만 비추고 있는데, 특히나 제목이 ‘여성과 가족’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보면, 가족 구성원의 성별에 따른 ‘성 역할’을 견고히 하여 ‘화목함’을 강조하고 있다. 가정 내에서 돌봄 노동을 수행하는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는 고생/희생의 소리를 소거한 채 전파하고 있다. 미디어, 국가(미디어에서 조금 더 나아가 영상에 쓰인 소스들이 공익광고라는 점에서)가 설정하는 이상향에는 삽입되지 못하는 소리이다. 이불 더미들은 특정한 이상향을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소리’들을 흡음하고 있다.
한편 전시장 중앙에는 다양한 인형과 길고 단단한 종류의 물건을 볼 수 있다. 길고 단단한 물건은 동그란 원형을 이루며 서 있는데, 그것들은 한 번쯤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맞거나 위협을 당해봤을 법한 것들이다. 구둣주걱, 파리채, 등 긁개, 골프채, 자, 칼 등의 오브제는 그것의 본래 기능과 달리 일명 ‘사랑의 매’라는 보편적인 공통의 기억을 불러온다. 가령, “다 네가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너를 사랑해서”라는 말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물건들은 역설적으로 되게도 아주 손쉽게 폭력의 도구로 사용된다. 신체적 폭력이 아니었더라도 상대의 훗날을 위한다는 말로 특정한 행동/말을 하지 못하도록 그 도구를 이용해 억압하는 것이다. 오브제는 가정/공동체 내 폭력이라는 보편의 기억을 호출함으로써 ‘사랑’의 의미를 재고한다. 그리고 조명된 ‘사랑의 매’ 오브제의 뒤쪽 벽면으로 그것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림자는 수직의 기다란 형태 여러 개와 특정 부분을 확대하여 기괴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직선적인 형태로 불안함을 조성해 ‘전쟁’과 같은 풍경이 비치는 것이다.
처음 <The war 가장 일상적인> 작품을 보면 인형 오브제가 눈에 띈다. 작가는 인형을 오브제로 가져온 것에 대해 자신의 오랜 습관인 ‘인형 수집’을 이유로 들었는데, 어릴 때 좋아했던 인형을 맏언니로서 동생에게 양보하길 요구받았던 기억이 오랜 시간 불편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라고 얘기한 바 있다. ‘가족애’를 위해 희생해야 했던 작가의 경험을 의미하는 인형과 보편의 기억인 ‘사랑의 매’ 오브제는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기억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하지만 두 오브제는 위-아래의 배치와 동그랗고 기다란 형태, 푹신하고 딱딱한 질감 등 서로 대조를 이루며 둘 사이에 허공을 두고 있다. 보편의 기억을 매개하는 오브제와 개인의 경험과 습관에서 가져온 오브제 사이에는 더욱 긴밀히 연결되지 못한 공백이 느껴진다.
작가가 ‘사랑’이라 명명했던 것들이 작가 개인의 가족사와 경험에 집중해있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보편적으로 ‘화목한 가족애’, 그러니까 ‘사랑’을 무조건 긍정적으로 떠올리는 것에 비판을 가한다. 작가는 “사랑의 태초의 형태는 가정에서부터”라고 말한 적이 있다. 권력적인 가부장제 속에서 억압과 폭력이 정당화되어왔던 점을 작가 개인의 경험에서부터 보편으로, 먼저 자신의 경험을 들여다본 것 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사랑’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긍정적인 것으로 바라보지도 않는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불’의 의미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전시의 소재로 쓰인 ‘이불’은 긍정과 부정을 모두 가지는 것인데, 아주 일상적인, 편안한, 포근히 감싸 안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한 개인이 감내하는 것들을 덮고 그 소리를 배제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불을 ‘밟는’다는 것은 한쪽이 감내해야 하는 일방적인 불편한 상황을 찾아내는 것을 의미함으로, 작가는 이 의미에 주목해 폭력적인 사랑의 양식에 비판을 가하고 있다.
무조건 ‘사랑’을 비판하기보다 그 이면의 불합리한 것들, 가부장제와 남성적 언어, 억압적, 폭력적인 것에 대한 경계와 그러한 불편한 음들을 덮은 채 무조건적인 화목함, 행복 한의 형용사가 따르는 ‘사랑’만을 쫓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또한,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권력 관계’는 가족과 같은 기초적인 사회공동체 내에서도 기본적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이 ‘사랑’의 관계가 되도록 요구된다. 관계에 따라 다양한 사랑이 요구되지만, 그 관계가 권력적이라면 과연 정말로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사랑의 이면에 폭력과 억압이라는 권력적인 언어를 걷어내려면 함께 찾고, 들리지 않는 것에 귀를 기울일 힘이 필요한 때다.
전시비평: 김효영
사랑과 전쟁은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김수정 작가는 현재 청년이라고 불리는 세대를 둘러싼 문제들을 자신의 위치에서 진단하고 질문하는 작업을 해왔다. 가령 <소외된 경력(2015)>와 <문턱 넘기(2016)>가 그러한 작품인데, <소외된 경력(2015)>은 성공, 경쟁, 스펙 쌓기만을 강요하는 현 사회에서 배제되는 청년들의 숱한 노동과 일상을 견고하지만 쉽게 부서질 수 있는 시멘트 조각과 수 백 여장의 A4용지와 함께 설치한 작품이다. <문턱 넘기(2016)>는 대학에서 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을 하나의 ‘문턱 넘기’라는 행위로 설정해두고 관객이 직접 문턱을 넘으면서 영상과 작가가 설치한 텍스트들(‘당신은 이 사회에 어떻게 적응할 것 인가’)을 볼 수 있도록 한 작업이다. 관객이 직접 문턱을 넘고, 문지방을 밟으면서 보게 되는 문구들은 사회에 진입한 청년들이 떠올렸을 법한 생각과 고민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작가는 청년의 세대적인 고민뿐만 아니라 ‘신진’, ‘젊음’, ‘청년’이라는 수식어로 소비되어버리는 작가의 경력들에 대한 문제의식 또한 함께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이후 한 가정의 딸로서, 사회 속 한 여성으로서 살아가면서 불편하고 부당하다고 느꼈던 점들에 대해 작업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일상유지(2016)>, <불편한/함 말하기 (2016)>, <삶을 소외시키지 않는, 스스로 책임지는 말하기(2017)>이 그러한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가족’이라는 제도의 정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비정상적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가족 구성원들의 삶, ‘여성에게 부과된 육아/가사 노동’, 그러한 노동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모성애에 대한 신화적 서사’ 등에 대해 말하고 표현하는 작업이다. 가족이라는 제도 안에서 희생되는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삶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지만, 특히 가부장제와 여성의 역할에 더 초점화해서 작업을 진행하였다.
작가는 이러한 작업들의 연장선상에서 ‘사랑’이라는 것에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족 간의 사랑, 연인 간의 사랑,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 등.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되고 은폐되는 일상적인 폭력성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작가는 최근 신세계멘토링 전(2017)에서 <사랑의 형태>라는 작업을 통해 가족, 연인, 친구 간의 사랑, 그리고 나라, 공동체에 대한 사랑까지 포괄하는 ‘사랑’에 대한 개념에 대해 고찰했다. 작가는 ‘달콤함’으로 대표되는 상징적인 매개물로서 사탕을 직접 만들어 설치하고, 이것을 관객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설치작업과 함께 미디어, 특히 공익광고 속에서 비춰지는 가족애, 애국, 공동체애의 모습 속에서 ‘사랑’이 어떠한 속성으로 설명되어지는지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도를 하였다. 작가는 설치와 영상작업으로 ‘사랑의 형태’을 제시하였지만, 친구, 가족, 국가처럼 큰 범주를 아우르는 ‘사랑’의 개념에 대해 고찰하면서 작가가 바라보는 사랑의 개념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못했다.
때문에 이번 <사랑과 전쟁은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All is fair in love and war> 전시에서는 작가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구체적인 경험들을 통해 ‘사랑’의 개념에 대해 접근을 시도했다. 작가는 가족을 가장 작은 제도의 단위체로 바라보며, 가부장제 속에서 자신이 겪었던 경험들을 경유하여 가부장제와 여성, 가족이라는 제도 안에서 일상적으로 드러나는 폭력적이고 모순적인 모습에 대해 고찰하고자 했다. 그러한 것들은 대체로 제도와 사회 속에서 요구되고 학습되어 온 이데올로기로서 작용되는 것이다. 때문에 작가는 그러한 폭력이 일상적으로 발생하지만 자각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에 대해 주목했다.
또한 작가는 가족 내 고정된 성역할이나 가족의 정형화된 이미지만을 요구하는 미디어에 대한 비판을 잊지 않는다. 공익광고 속에서 흔히 노출되는 가족의 모습은 평화롭고 온전하고 따뜻한 이미지로 대표되며, 아버지는 가장의 역할, 어머니는 부엌이나 돌봄노동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작가는 영상을 이불 속에 설치하여 볼 수 있도록 한다.
작가는 이불, 인형, 빗자루, 구두주걱, 우산, 테니스 라켓 등과 같이 일상적인 소재들을 설치작업의 요소로 가져오지만, 오브제들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도록 설치하여 사랑의 속성에 대해 제시한다. 특히 전시장 전반에 걸쳐 설치된 이불은 사람의 신체를 보온, 보호해주는 것으로 가정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어떤 폭력을 감추고 숨길 수 있는 것으로 ‘사랑’의 이면, 이중성을 드러내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처럼 작가는 <사랑과 전쟁은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All is fair in love and war>전시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지워졌던 존재들, 은폐되어 온 일상적 폭력들을 설치작업을 통해 드러낸다.